# Lockon Stratos
간신히 둘러쓰고 있던 치장을 훌쩍 벗어던진 사내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때부터 꺼림칙하니 알 수 없는 <뭔가>가 되어버렸다. 야수같은 사내, 닳고 닳은 용병, 질 나쁜 싸움꾼. 그것 뿐이라 생각했던 알리 알 사셰스의 탁한 연녹색 동공안에서 춤추는 불꽃이 자신을 비웃고 있다. 상대의 의지를 송두리 채 깔아뭉개고 집어삼키는 게 너무나 당연한 권리인양 욕망을 들이대는 그의 힘, 그랬다. 힘이다. 순수한 의지의 힘, 잡아먹고 살아남는다는 데 한 점의 의문도 가지지 않는, 날 것 그대로의 욕망이자 힘이 지금 록온 스트라토스란 알맹이 없이 텅 빈 뭔가를 비웃으며 깔아 뭉개려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록온은 다시금 흐트러지려는 집중력을 간신히 그러모으며 이를 악물었다.
사셰스가 ‘동’'의 여유있는 웃음을 집어던진 그때부터 자신은 도리어 조금씩 제어를 잃고 어딘가 한 발 떨어진 타인의 그것을 지켜보듯 스스로에게 닥친 위기들을 기계적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었다. 실감이 엷다.
적인가 동지인가, 자신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카드와 선택지는 무엇인가, 훈련의 흔적과 필요한 지식의 축적 여부, 그리고…… 목적. 목적? 살아남았다. 살아서, 남아버렸다. 이 기시감. 끔찍한 공허함, 살아서 남아버린 자신은, 무엇을 위해, 무엇을 쥐기 위해, 어디로, 무엇을 노려서??
남자와 맞섰던 투지가 맥없이 수그러들기 시작한다. 스스로의 반응은 자신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를 박아 널 욕보이겠노라 덤비는 사내 앞에서 이토록 냉담한 무기력함만이 남아버릴 수 있다니? 록온이 느낀 건 두려움도 패배감도 아닌, 그저 진저리나는 신물남이었다. 명치 언저리가 묵직하다. 쌓고 괴이고 처박아둔 감정과 <이유>들이, 기억을 잃었어도 여전히 거기 존재함을 주장한다. 어떻게 생겨난 지 알 수 없으나 거기에 존재함이 확실한 병든 환부가, 바로 사셰스가 드러낸 짐승의 이빨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의 힘, 그의 치떨리는 뻔뻔함, 거리낄 것 없는 야수의 얼굴. 그리고 록온은 당혹해했다. 어째서, 속에서 솟구친 혐오감은 눈앞의 사내가 아닌, 스스로에게 향하는 것인가? 맞서 싸우고자 같이 이를 세우는 참이던 자신에게.
“웃기지마. 내가 살렸으니까, 넌 내꺼다. 다 내놔. 몸이든 기억이든 뭐든."
나름 그럴싸한 이유라 심드렁하니 납득해버리는 감성의 한 켠은 더더욱이나 아찔하다. 그럼에도 반 건성으로 내뱉는 대답은 자신의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바람 앞에 차례로 꺼지는 불씨들처럼 이성과 감성을 연결하는 신경줄들이 하나씩 단절되는 그런 느낌, 줘버려, 가지고 싶다면 줘버리고 먹어버리고 싶다면 던져주어라 내뱉는 속삭임. 속삭임? 아 그렇다, 어린 속삭임이었다.
더이상 눌려있을 필요가 없어 이렇게 귓전에 울리는 어린애의 속삭임, 줘버려, 포기해버려, 그리고 같이 가버리자, 돌아갈 수 있어, 그러면 다시 만날 수 있어………
"대답이 필요없는 관계란 참 좋은 거지."
우격다짐으로 밀고 들어오는 손가락들이 이를 벌리고 혀를 누르며 꿈틀거리는 감각에 퍼뜩 정신을 차리자마자 셔츠가 뜯겨져 나갔다. 절로 등골부터 발끝까지 일어나는 소름에 전율한 록온은 스스로에게 외치기 시작했다. 아니야, 그런 것이 아니다, 자신은 이렇게 살아있다, 어떤 이유로든 살아있는 것이다, 무언가를 위해, 그래, 찾아야한다,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이손으로, 나는…!!!
명치 끝이 저렸다. 산 채로 썩어 들어가는 듯한 감각, 실제 존재할 리 없는 동통이 뱃속을 휘저었다. 마치, 거기에 오랫동안 굳어있었던 뭔가를 되새김질 하려는 듯. 그리고 록온은 불현듯 이 감각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건 지독한 피로감, 바로 그것이었다. 목적을 찾고, 이유를 찾고, 변명을 찾고, 답을 찾아서, 살아있기 위해 목적과 이유와 답을 찾아 붙여대며 지쳐버린, 피로.
“동의하지? 너도 마찬가지 아냐, 응? 실은 남의 대답 따위 필요도 없는 놈이라구, 나처럼. 안그래?"
대꾸를 바라지 않는 사셰스의 야유가 똑바로 의식에 떨어져내렸고 별 것 아니라면 아닐 그 말의 의미가 천천히 묵직한 둔통이 되어 록온을 덮쳤다. 너도 마찬가지 아냐, 라 비웃는 저 목소리. 자신은 이 목소리를 알고 있다. 아아 그래, 확실히 알고 있어.
자각의 다음 순간, 청년은 그때까지의 무력함을 단번에 뒤집어 필사적으로 남자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계산된 움직임 내지 기습같은 건 염두에도 없었다. 그저 제입을 틀어막은 손가락들을 물어뜯고, 힘껏 자신을 누르는 팔을 미친 듯 찍어 할퀴며 거부하는 것이 다다. 능욕을 피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건 애초에 제대로 실감조차 하지 못했다. 다만, 숨막히는 이것을 빼내고 싶었고 그저 확인하고자 외치고 싶었을 뿐이다. 사셰스, 다시 한 번, 그 말을 해봐, 나에게, 그 한 마디를!!
절로 손가락이 사셰스의 부상당한 팔에 파고들어 섬유와 보습젤로 된 패드를 긁었다. 귓전에 야수 같은 남자의 그렁거리는 광소가 쩌렁쩌렁 내려앉는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거냐고도 외치고 싶었다. 날뛸수록 맹수의 발톱인양 손가락이 파고드는 부위도 깊어진다. 축축한 가제, 그리고 덜 아문 살과 핏줄에까지.
즐거워 미치겠다는 듯 웃어제끼는 소리가 바로 귓전에 쟁쟁한 가운데, 사셰스는 아픔도 느끼지 않는 양 록온의 귓불을 씹었다.
“괜찮으니까 더 날뛰어봐."
이 사내는 알고있다고 록온은 확신했다. 저한테 록온이 뭘 듣고 싶어 하는가를 아주 확실하게 알고있다. 거칠지만 규칙적인 숨소리, 야수의 그것처럼 호흡을 고르며 사냥감을 쫓는 이 기척, 그리고 거기에 여지없이 반응해버리는 자신, 저항해, 살아남아, 아니야 그냥 먹게놔둬, 던져버리라구, 편해질거야, 이미 지쳤잖아, 안 돼, 아직 살아있어, 어째서? 무엇을 바래서? 눅진한 고통을 닮은 피로, 다시 이어지는 속삭임, 신경을 찔러대며 엉키는 루프.
록온은 반쯤은 무의식적으로 의체로 교환된 오른손의 세 손가락을 사셰스의 피부 위에 올렸다. 왼손이 파헤쳐놓은 피투성이 살갗이 둔한 의체의 감각너머로 느껴진다. 그리고 청년은 반쯤은 의식적으로 각도와 힘을 조절해 그것을 박아 넣었다. 복합폴리머와 세라믹으로 된 의체는 당연히 진피를 뚫고 들어가 아물고있는 근육에 깊이 박혔고, 동시에 록온의 오른손과 이어져있던 연약한 접합부 역시 파열시켰다.
“……젠장…할…!!"
대담한 사셰스라 할지라도 이깟 일로 팔의 근육조직과 까딱하면 신경까지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는지 즉시 록온을 놔주고 그의 손을 뿌리쳤다. 손가락 끝에는 그의 피, 파열한 접합부에서 솟구쳐 흐른 자신의 피로 청년의 흰 손은 삽시간에 붉게 물들었으며 비릿하게 진동하는 피냄새는 거짓말처럼 평화로이 내리쬐던 오후의 햇발을 천천히 퇴색시키고 그렇게 바래진 햇발은 거의 한계까지 끓어올랐던 감정마저 삽시간에 증발시킨다. 풀려난 몸은 긴장과 경계 혹은 분노 대신 그저 진한 피로를 호소하고 있었다.
“제법인데, 너?"
입술 끝을 제법 사납게 일그러뜨리며 그러나 여전히 웃음기가 묻은 한 마디를 던진 사셰스가 대꾸도 기다리지 않고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록온은 그럭저럭 성한 왼팔로 사셰스의 다친 왼팔을 잡았다. 그리고 청년은 한 마디도 하지않고, 그저 천천히 제 너덜거리는 셔츠자락을 찢어내 피가 솟는 환부를 감아 지혈대를 만들었다. 딱히 계산된 행동은 아니다. 단지, 눈앞의 남자에게 할 말이 있었고 그가 자신으로 인해 피를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뇌의 결정 대신, 습관이 내린 반사적 판단이라고 어딘지 멍해진 머릿속으로 생각해본다. 어쨌거나 속없이 멍청한 짓이지만.
남자도 딱 그렇게 생각한 것 같았다.
“뭐하는 거야."
“……그냥."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러고보니 사셰스에게 막혀있는 동안 뭔가를 제법 많이 외쳐댄 듯도 하다. 제대로 된 말이 되어 입밖에 나간 건 거의 없지만 말이다.
“듣고 싶은 게 있겠지?"
고개가 저절로 들리고, 시선이 그를 쫓는다. 사셰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다만 좀 전과 달리, 진심으로 기쁜 미소를 띄고 차분하게 자신을 보고 있다. 불투명한 연녹색 눈은 마침 태양을 등지고 있어 어떤 표정을 품고 있는가가 확실하게 보이지 않았다.
록온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고, 남자는 마찬가지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느릿하니 숙여온다. 뜨거운 입술이 자신의 그것을 덮어온 순간, 청년은 눈을 감았다.
# Ali Al-Saachez
놈을 처음으로 맞닥뜨린 때를 되돌려본다.
모랄리아, 그리고 쿠르디스 꼬맹이의 하얀 건담, 콕핏에서 나와 서로에게 총을 겨누었던 저 때, 공간을 갈랐던 빔은 명백히 출력을 낮추고 세심히 계산된 궤적으로 자신과 꼬맹이를 떼어놨더랬다. 연사하는 빔의 궤적은 정말이지 깔끔하고도 매섭게 상대와의 거리를 조절하는 솜씨를 보였고 마지막, 자신이 그의 사거리를 이탈할 때는 나름 자신이 가진 최고의 회피기동을 시연해야 했다. 그리고, 과연 저격형 기체의 파일럿이긴 하구나 생각한 뒤에 놈의 물러빠진 감각을 비웃었더랬지. 만약 자신이 그의 입장이었다면 어땠을까? 꼬맹이가 당장 말려들지 않을 정도로만 계산해 쏴댔을 것이다. 백 번 양보한다쳐도 출력까지 낮추지야 않았겠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상대가 열 살 먹은 꼬맹이든 다섯 살 먹은 꼬맹이든 전장에서 동료와 보호자를 칼처럼 구분못할 정신머리라면 아예 싸우려 기어 나오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놈은,
“뭐하는 거야."
어딘지 맥빠져 보이는 눈으로, 방금 전까지 저를 짓누르던 팔에다 지혈대를 두르는 꼬락서니가 그저 기막힐 따름이다. 정말 뭐하자는 거냐, 너.
“……그냥."
본인도 제가 지금 얼마나 밸없는 짓을 하고 있는가 잘 아는 눈치다. 십중팔구 머리의 판단이 아니라 몸에 밴 습성이 튀어나온 게다. 상냥함? 배려? 인정많음? 웃기는 소리.
사셰스 자신에게 지혈대를 감는 동안 그대로 방치된 채 피가 흐르는 놈의 오른손을 잠시 쳐다보았다. 물론 의체라 감각이 둔하기도 하겠지만서도, 어찌보면 그쪽이 더 중상일텐데 말이지. 대개 거기까지 따지지 않더라도, 제 몸에 난 상처를 먼저 감싸는 게 인간의 생존본능이다. 아아 그렇군, 이놈은,
“듣고 싶은 게 있겠지?"
고개를 드는 놈의 지친 얼굴이, 진정 사랑스럽게 보여 절로 웃음이 났다. 빙고, 네놈의 날아간 오른쪽 눈을 찾았다, 이 덜 떨어진 애송이. 죽으려 환장한, 빌어먹게 밥맛 떨어지는, 제대로 돌아버린 자식아.
그대로 입술을 빼앗자, 스르르 눈을 감는 청년을 비웃으며 사셰스는 어쩐지 식어버린 입속에다 혀를 넣어 이번에야 느긋하니 그의 숨결과 체취를 맛보기 시작했다. 놈이 듣고싶은 게 무엇이든, 더이상 어떤 질문도 대답도 필요없을 것이다. 적어도 이 오후중에는, 아마도.
“………!!!"
길게 맛보던 입술을 떼놓자마자 갈라지는 숨소리, 신음이 되기 전에 흩어진 호흡을 애써 추스리며 녀석이 고개를 숙였다. 아마도 제 표정과 기색을 가리기 위해.
사셰스는 그가 하는 양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손가락에 부드럽게 감겨오는 밤색 고수머리를 쓸어넘겼다. 숨길 수 있다면 그래보라구. 기분은 한없이 유쾌하다. 유쾌할만도 하지, 최후의 전투에서 주고받았던 말의 파편이 제대로 녀석의 급소를 찌르고 어딘가 다분히 정상이 아닌 놈 답게 찔린 급소를 단서로 알아먹은 채 이토록 거기에 연연해하는 꼴이 얼마나 볼 만한가 말야.
“쉿."
뭐라 달싹이려는 입술을 자못 여유있게 쪼는 듯 키스하며 달랬다.
놈의 멀어버린 오른쪽 눈이란 이것이다. 같잖은 복수말이다. 피흘리는 타인을 부지불식간에 감싸주고 보는 이 순한 짐승을, 기꺼이 세계의 적이 될 정도로 모진 맹수로 바꿔버린, 뒤틀린 분노. 아 그렇겠지, 지겹고도 치명적인 레퍼토리. 기억을 잃어버리고도 그것과 연결된 부분을 건드리면 미친 듯 날뛰고 보는 놈의 위크포인트. 아마 그걸 찾기위해, 이루기위해 이놈은 살아왔던 거다.
“같이 찾아보자고, 네녀석이 바라는 걸 말야. 자…… 천천히……"
……미친놈.
정말 사셰스가 유도하는 대로 천천히 고개를 꺾으며 이어지는 입맞춤에 응하는 양을 내려다보며, 남자는 즐겁게 웃었다. 성욕과 식욕은 어지간히도 닮아, 마음먹은대로 고이 차려진 밥상 또는 육체에 대해 반응하는 지점도 엇비슷하다. 다소 무리가 가는 한이 있더라도 손대지 않는다면 남자가 아니지. 고래로 진리처럼 전해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본시 전쟁이란 사내는 죽이고 그 처는 범하는 것이라, MS는 부수고 그 파일럿은 좋을대로 해치우면 그만인게다. 못할 건 또 뭔가, 기왕에 놈과 어울려 놀아주기로 한 거.
“손, 줘봐."
다행히 자신의 식성은 그닥 까다롭지 않았고 어느 쪽인가 하면 소테에 쓰인 고기가 암탉인가 수탉인가 가리는 편도 아니다. 전장의 짐승이란 먹을 수 있는 고기, 마실 수 있는 물, 품어서 따뜻한 육신, 그걸로 족해하는 법이니까.
피가 낭자한 오른손을 싸매고, 아직 스물거리며 솟는 피를 빨아내자 억누른 듯 얌전하던 손가락이 미미하게 경련했으나, 결코 자신을 떨쳐내지는 않는다.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스스로의 바램과 본능, 그리고 아마도- '생리적 혐오'와 싸우고있는 청년의 혼돈이 잡힐 듯 생생한 것이 제법 사람 입맛을 돋구는 데도 있고. 해서 내심 실실 웃는 동안 혀가 약지와 중지를 핥은 뒤 검지에까지 이르자, 조금 하얗게 질린 맨살이 대번에 긴장했고, 어느새 고개 들어 빤히 자신을 쳐다보는 녹색 눈과 사셰스의 시선이 또한 거기서 부딪혔다. 절박하게, 한 톨이라도 좋으니 이쪽의 본의와, 진심과, 생각의 단초를 알아보겠노라 매달리는 그, 눈이-
“믿어, 찾게 될테니."
사셰스는 이끌리듯 중얼거리고,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가 누군가에게 이토록 진심을 담아 대답한 적이 있었던가? 그것이 아무리 악의와 농간에 버무려진 유독한 진실이라해도.
# Lockon Stratos
이자가 열쇠를 가지고 있다.
그것만이 지금 록온 스트라토스가 유일하게 쥐고있는 사실이었다. 확실히 이 사내는 기억 잃기 전의 자신을 알고 있으며, 그것이 무엇이건 자신과의 <관계>를 갖고 있으며, 자신은 이유가 무엇이든 거기에 반응한다. 그리고 남자는 자신을 원한다고 한다, 스스로의 것이 되어라 넉살좋게 선언하고 제가 살렸으니 제것이라 기세 좋게 큰소리치기까지 했다. 반쯤은 광대같은 그 흰소리들이, 그런데 자신을 움켜잡는다, 외면할 수 없게 만들고 급기야는 매달리게 한다. 웃고 있는 남자의 회색기미 완연한 탁한 동공에서 춤추는 그의 힘이, 그 불길하게 번뜩이는 활기가 선열하게도 들이대는 단 한 점의 진심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너를 원한다, 고 외치는 새빨간 진심이.
그건 기억을 원한다거나 이용가치를 저울질하는 남자의 닳고 닳은 계산속과 전혀 다른 위치에서 존재를 주장하며 록온을 혼란스럽게 했다. 근거라고는 저희들이 제시하는 믿거나말거나 <기억상실 경위>뿐인 남자의 말은 전혀 신뢰할 수 없으나 제것이 되라고까지 멋대로 비약하는 남자의 심사에서는 어지럽게도 찔러대는 진실의 단초들이 느껴졌던 것이다. 뭔가가 거기 있었다. 알리 알 사셰스를 이루고, 그와 얽힌 록온 스트라토스를 이루는 뭔가가, 거기에, 확실하게-
“믿어, 찾게 될 테니."
듣는 순간, 뱃속에 뭉쳐있는 감정의 덩어리들이 일시에 파르르 떨며 곤두서는 걸 느꼈다. 아 과연. 확인해야 해, 그리고 싸워야한다, 무엇이든지, 악착같이, 상대해줘, 끝까지 따라가봐, 따라가서, 살아.
그래, 살아야지…… 록온은 홀린 듯 입술을 열고 남자의 혀를 맞아들였다. 필사적으로 그 외설적인 움직임을 쫓으며, 어쩔 수 없이 뒷덜미에 돋아 오르는 소름을 참으려 어깨를 움츠린다. 진한 땀내가 밴 타인의 숨결을 삼키고 상대의 단단한 턱선이며 윤곽을 차례로 알아가면서 그는 문득 실소를 흘렸다.
자신은 역시 어딘가 병들어 있는 것이다. 필사적으로 이 역할놀음을 따라가는 주제에, 머릿속- 아니, 가슴속 한 켠에선 아직도 어린 소년의 속삭임이 울리고 있었다. 돌아가자, 돌아가면 다시 만날 수 있어, 달콤하게 꿈꾸듯 영원히 잠들어버리면-
그리고 그 속삭임을 지워버리고 싶어 더더욱 절박하게 남자가 내민 손을 잡으려 몸부림치는 스스로는, 적어도 이 낯선 사내의 진심을 알기위해 별 갈등도 없이 제몸을 던질만큼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과 같은 스텝을 부러 맞춰주며 기꺼이 광대춤을 추는 이 야수같은 남자도 딱 그만큼은 미쳐있는 셈이다.
“………믿게 해줘봐."
몸은 차게 식어가고 손이 닿는 곳들은 오싹오싹 떨며 욕망의 대상이 된 스스로를 거부하려 몸부림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자신 역시 알리 알 사셰스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큰소리친대로 안아보라구, 이런 너덜하고 볼품없는 사내자식의 몸에 진짜로 욕정해보라지, 어디 증명해봐, 당신의 진심이 진실인가를, 나에게.
"성질 나쁘긴."
소리죽인 딱 한 마디의 호소에서 정확하게 도발을 읽어낸 남자가 싱긋, 상쾌하게 웃으며 손을 뻗어왔다.